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Asia and the Pacific

고(故) 누라크 아브드라흐마노프 © 아이기네문화연구센터

키르기스스탄 민속음악 교육의 새로운 바람, 전통 코무즈 교육법 ‘엔벨기’

코무즈(Komuz)는 키르기스의 전통악기이다. 세 개의 현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한 개의 나무판으로 제작한다. 코무즈의 현은 원래 말린 양의 내장으로 만들지만 현대에 와서는 낚싯줄이 사용되기도 한다.

코무즈의 기원에 관해 애호가와 연주자들에게 잘 알려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캄바르(Kambar)라는 용감한 사냥꾼이 살았다. 그는 높은 산에 올라가 짐승과 새를 사냥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다가 우연히 음악 소리를 듣게 된 그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실 한 줄이 매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이 아니라 말린 양, 즉 케이베렌(Kayberen)의 소화기관이었다. 캄바르는 이 내장과 나무 한 조각을 가지고 악기를 만들었고 이것으로 최초의 키르기스 음악을 연주했다. 이 악기는 후에 코무즈라 불리게 되었고, 캄바르가 작곡한 음악은 그의 자식들, 손자들 그리고 증손자들에게 전승되었는데 바로 ‘캄바르칸(Kambarkan)’이다.

코무즈는 키르기스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만쿠르트(Mankurt) 전설에도 코무즈가 등장한다. 만쿠르트는 그들의 민족적 뿌리, 심지어 자신의 부모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천국의 땅 키르기스를 점령한 침략자들은 키르기스인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백 명의 어린 소년들을 데려갔다. 그들은 소년들의 과거와 부모, 고향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강제로 지워버리고 만쿠르트로 키웠다. 20년 후 자기 민족을 죽이고 노예로 삼도록 교육받은 소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와 형제자매를 살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무즈의 음악을 듣는 순간 그들은 갑자기 학살을 멈추었다. 코무즈 소리가 소년들의 어린시절과 고향에 대한 추억을 일깨웠던 것이다.

오늘날 코무즈는 키르기스스탄 내 87개 모든 음악학교에서 교육하고 있다. 학생들은 유럽식의 12음계에 따라 코무즈를 배우며, 민속음악 고등교육기관 또한 같은 기법으로 가르친다. 코무즈 교육에 12음 기법이 도입된 것은 소비에트 시절부터이다.

반면, 전통적인 코무즈 교습법은 악기의 출현과 거의 동시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코무즈 명인들이 자신만의 교육법을 개발하고 전통적인 교육체계인 우스타트-샤키르트(Ustat-Shakirt, 장인도제)체제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쳤다. 많은 후계자와 학생들이 유명한 코무즈 명인과 연주자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명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연주법을 가르쳤으며 각 곡의 의미와 기원을 설명하고, 명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 곡을 들려주었다. 명인들은 학생들이 코무즈의 세계에 몰두하도록 인도하며, 연주자의 영혼만큼이나 손을 쓰는 기법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종종 위대한 코무즈 연주자들은 동시에 뛰어난 악기 제작자이기도 했다. 오늘날 고(故) 누라크 아브드라흐마노프(Nurak Abdyrakhmanov, 1947-2014)는 키르기스인들의 기억 속에 위대한 작곡가이자 연주가 겸 악기 제작자로 남아 있다. 그는 소비에트 시절 나른(Naryn)주의 아크-탈라(Ak-Talaa) 마을에서 음악교사로 일할 때부터, 정규 교육과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코무즈 교육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누라크는 일찍이 유럽의 12음 기법이 코무즈의 음악적 미묘함과 잠재성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고, 30가지에 이르는 코무즈의 표현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코무즈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운다면 훨씬 쉽고 빨리 연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누라크는 지난 40여 년 간 코무즈를 위한 특별한 교육법을 찾고자 고군분투했다. 문화적 맥락을 지키면서도 쉽게 코무즈를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키르기스 악기의 풍부한 음악적 다양성을 보존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 코무즈 연주용 표기법인 엔벨기(En Belgi)를 창시했다. 엔벨기는 열 손가락 각각의 기능을 통해 코무즈 연주법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손가락 연주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연주기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코무즈의 철학까지 함께 가르치는 엔벨기는, 코무즈의 미묘하고 심오한 음조를 가장 잘 전승할 수 있는 기법이다.

엔벨기표기법을 보급하려는 누라크의 생각을 알게 된 아이기네문화연구센터(Aigine Cultural Research Center, 이하 아이기네)는 2009년 그와 함께 시범 프로젝트 ‘전통음악의 보존과 전승(Preserving and Transmitting Traditional Music)’을 시행하였다. 목적은 누라크가 오랫동안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코무즈 연주교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시행된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코무즈 연주용 누라크 안드라흐모노프의 엔벨기표기법(Komuz Playing with Nurak Andrakhmonov’s En Belgi Note System)』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책에는 총 31개의 연주곡이 수록돼 있는데, 모든 곡이 12음 기법과 엔벨기표기법 두 가지 버전으로 표기돼 있다. 연주곡을 난이도에 따라 배열하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각자 수준에 맞는 곡을 선택할 수 있다. 동봉되는 CD에는 31곡에 대한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의 상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위 책은 정규 및 비정규 교육과정의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아이기네와 누라크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키르기스스탄의 각 지역에서 40여 명의 국립 음악학교 소속 교사들을 선발해 엔벨기연주법을 가르쳤다. 각 학교를 대표하는 교사들을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훈련시킨 다음, 엔벨기를 정규 교육과정에 도입하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주로 휴일에 세미나를 진행했으며 연간 세 차례의 밀도 높은 세미나를 열었다. 주교재는 『코무즈 연주용 누라크 안드라흐모노프의 엔벨기표기법』이었고, 커리큘럼은 명인 누라크와의 소통을 바탕으로 기획하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모든 참가자들은 코무즈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이후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정규 및 비정규 교육과정 체제 하에서 꾸준히 학생들을 지도했다. 현재, 엔벨기표기법은 키르기스스탄의 음악학교와 대학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소로스재단(Soros Foundation-Kyrgyzstan, SFK)은 2013년 청년 프로그램(Youth Program)의 일환으로 시각장애 아동 12명에게 엔벨기연주법을 가르쳤다. 누라크가 직접 훈련을 담당한 덕분에 장애아동들은 점차 전통적인 방식으로 코무즈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즉흥 연주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으며, 구전되는 민속음악의 역사에 대한 지식도 갖게 되었다.

누라크는 엔벨기연주법을 공부한 제자 500명과 다함께 코무즈를 연주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 꿈은 실현되었다. 2016 세계노마드대회(World Nomad Games 2016) 개막식에서 아타이 오곤바예프(Atai Ogonbaev) 작곡의 ‘마쉬 보토이(Mash Botoy, 말경주라는 뜻)’를 연주했던 천 명의 코무즈 앙상블의 주요 연주가들이 그의 제자들이었고, 주요 코디네이터 48명은 아이기네 프로젝트의 졸업생 출신이었다. 이들은 위대한 교육자이자 음악가인 누라크를 기리기 위해 앙상블에 그가 창시한 코무즈 연주 기법인 ‘엔벨기’의 이름을 붙였다.